한국거래소가 11월 1일 상장사 151곳을 ‘저PBR 기업’으로 처음 공개했다. 이 회사들의 PBR(주가를 회사가 가진 순자산으로 나눈 값)은 단순 평균 약 0.25배로, 상장사 평균 약 1.8배에 한참 못 미친다. 현대제철·이마트·롯데쇼핑처럼 시가총액 1조 원이 넘는 회사도 이름을 올렸다.
흔한 해석은 둘 중 하나다. 시장이 싸다고 인정한 주식 목록이니 언젠가 오른다, 아니면 거래소가 찍은 망신 명단이니 떨어진다. 하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기준에 걸린 185곳 가운데 주주가치를 높이겠다는 계획을 낸 34곳은 명단에서 빠졌다. 이 명단은 ‘싸다’는 표시라기보다 ‘아직 바뀐 게 없다’는 표시에 가깝다.
- 저PBR 151곳은 어떤 기준으로 뽑혔나
PBR이 1배보다 낮다는 건 회사 전체 몸값(시가총액)이 장부상 순자산에도 못 미친다는 뜻이다. 순자산이 1조 원인 회사의 PBR이 0.15배라면 시장은 이 회사를 1,500억 원으로 평가하는 셈이다. 이마트의 PBR이 지난달 22일 기준 0.15배였다.
거래소는 상장사 2,431곳을 업종 11개로 나누고, 최근 3년(6개 반기 연속 또는 7개 반기 중 6개 반기) 동안 업종 안에서 PBR이 유가증권시장 하위 25%, 코스닥 하위 10%에 든 회사를 골랐다. 이렇게 걸린 회사가 185곳이다. 같은 업종끼리 비교한 이유는 업종마다 정상적인 PBR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명단만 봐도 코스피 부동산 업종 평균은 0.11배, 정보기술은 0.63배였다.
- 왜 185곳이 아니라 151곳만 공개됐나
공개 7거래일 전까지 기업가치 제고계획(주가를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약속)을 공시하면 1년간 공개가 면제된다. 지난달 22일까지 계획을 낸 62곳 가운데 49곳이 저PBR 요건에 해당했고, 이 중 34곳이 명단에서 빠졌다.
나머지 15곳은 계획을 내고도 명단에 남았다. 최근 6년(12개 반기 연속 또는 13개 반기 중 12개 반기) 내내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면 계획을 내도 예외가 없다. 숙제를 낸 학생은 이름을 빼 주지만, 6년째 같은 숙제만 낸 학생은 빼 주지 않는 셈이다.
쉽게 말해 151곳 중 136곳은 ‘계획조차 내지 않은 회사’, 15곳은 ‘계획을 냈지만 너무 오래 제자리인 회사’다.
- 명단에 오르면 무엇이 붙나
명단은 거래소 공시 사이트 KIND의 ‘밸류업 페이지’에 내년 5월까지 걸리고, 증권사 MTS(모바일 주식 앱)·HTS(PC 주식 프로그램)에도 해당 종목에 ‘저PBR’ 태그가 붙을 예정이다. 거래소는 매년 5월과 11월 명단을 새로 낸다. 연합뉴스는 이를 이름을 공개해 망신을 주는 ‘네이밍 앤드 셰이밍’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거래소는 151곳 모두에 2027년 1대1 맞춤형 PBR 개선 컨설팅을 제공한다. 거래소는 “일부 기업은 PBR 개선계획을 제출하면 공표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음에도 저PBR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거나 구체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개선계획을 제출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명단에 오른 회사가 다음 명단에서 빠지는 길도 정해져 있는 셈이다. 계획을 내면 된다.
- 진짜 압박은 왜 기관투자자에게서 나오나
태그 하나로 회사가 바뀌지는 않는다. 압박이 실제로 회사에 닿는 길은 주식을 많이 가진 기관투자자다. 금융위원회는 저PBR 기업에 대한 기관투자자의 주주 관여를 촉진하도록 스튜어드십 코드(기관이 투자한 회사의 경영을 감시하도록 정한 행동 지침) 가이드라인을 고치고 있다.
금융위는 기관이 경영진과의 대화, 개선 요구, 의결권 행사 같은 실질적인 관여를 했는지를 앞으로 면밀히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흐름은 이렇다. 명단 공개 → 기관이 ‘이 회사에 무엇을 요구했나’를 점검받는다 → 기관이 주총에서 회사에 계획을 요구한다 → 회사가 주주환원 확대·자본효율성 개선·지배구조 개선 중 무엇으로 답할지 고른다.
중고 거래 앱에서 시세보다 한참 싼 물건을 생각하면 된다. 싸다고 바로 팔리는 게 아니라, 판매자가 흠을 고치겠다고 나서야 값이 붙는다. 다만 주식은 판매자(회사)가 움직이지 않으면 주주가 의결권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 낮은 PBR은 왜 ‘싸다’는 뜻만은 아닌가
34곳이 빠졌다는 사실이 이 명단의 성격을 보여 준다. 이 회사들도 PBR이 낮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계획을 냈기 때문에 이름이 빠졌다. 거래소가 가려낸 건 ‘가장 싼 회사’가 아니라 ‘싼데 주주에게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 없는 회사’다.
그래서 같은 저PBR이라도 뜻이 갈린다. 계획을 내고 배당을 늘리는 회사의 저PBR과, 계획도 없이 수년째 같은 자리인 회사의 저PBR은 다르다. 뒤쪽은 시장이 ‘돈을 쌓아 두기만 하고 주주와 나누지 않는다’고 매긴 값일 수 있다.
- 비트프레스 인사이트
이번 명단으로 달라지는 건 주가 자체가 아니라 회사가 받는 질문이다. 지금까지 낮은 PBR은 주주가 혼자 참는 문제였다. 이제는 앱 화면의 태그로 모든 투자자에게 보일 예정이고, 기관투자자는 그 회사에 무엇을 요구했는지 점검받는다. 회사는 다음 공개인 내년 5월 전까지 계획을 낼지, 6개월 더 이름을 걸어 둘지 골라야 한다.
그래서 명단에 오른 주식을 볼 때 ‘PBR이 얼마나 낮은가’는 첫 질문이 아니다. 회사가 이 압박에 주주환원 계획으로 답하는지, 아니면 버티는지가 먼저다. 이미 6년을 버틴 15곳이 보여 주듯 계획서 한 장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낮은 PBR은 ‘얼마나 싼가’가 아니라 ‘회사가 바꿀 의지를 보였나’로 따져야 하는 숫자다.
출처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103177206
https://www.yna.co.kr/view/AKR20261031025200008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11018265i
용어 풀이
PBR(주가순자산비율) — 주가를 주당 순자산으로 나눈 값으로, 1배보다 낮으면 시가총액이 장부상 순자산에도 못 미친다는 뜻입니다.
기업가치 제고계획 — 상장사가 주가를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스스로 공시하는 계획으로, 밸류업 공시라고도 부릅니다.
스튜어드십 코드 — 연기금·운용사 같은 기관투자자가 투자한 회사의 경영을 감시하고 의결권을 성실히 행사하도록 정한 행동 지침입니다.
MTS·HTS — 증권사가 제공하는 모바일 주식 앱(MTS)과 PC 주식 거래 프로그램(HTS)입니다.
GICS — 전 세계 증시에서 쓰는 업종 분류 기준으로, 이번 선정은 이 기준의 11개 업종으로 나눠 비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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